**에피소드 1**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밤, 테크 스타트업 '이노베이트' 본사의 높은 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다. 30층 건물의 최상층에 위치한 CEO 사무실에서 레이첼 앤은 내일의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재빠르게 움직였고, 푸른빛 모니터 화면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레이첼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밤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른두 살의 나이에 성공적인 메타버스 회사 'ESCAPE REALITY'의 CEO가 된 그녀였지만, 성공이 가져다준 안정감은 그녀의 내면에 자리 잡은 어둠을 완전히 지워주지는 못했다.
창밖으로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며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10년 전 그날도 이런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 그녀는 잠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들이 빗방울에 반사되어 흐릿하게 일렁였다.
'진정해, 레이첼. 그건 과거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작업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사무실 전체가 어둠에 잠겼다. 정전이었다.
"젠장..." 레이첼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비상 전원이 곧 들어올 거라 생각했지만, 몇 초가 지나도 어둠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복도는 더욱 어두웠다. 레이첼의 발걸음 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렸다. 그녀는 불안감을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그녀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누구세요?" 그녀가 돌아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휴대폰 불빛이 누군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것은 지난주에 입사한 신입 인턴 에단 제임스 나이트였다. 높은 콧대와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짙은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앤 대표님. 놀라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에단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했다. "늦게까지 일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레이첼은 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죠, 나이트 씨?"
에단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프로젝트 자료를 좀 더 검토하고 싶어서요. 내일 프레젠테이션이 중요하다고 들었거든요."
그의 설명은 합리적이었지만, 레이첼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녀는 에단이 입사한 이후로 그에 대해 이상한 느낌을 받아왔다. 그는 항상 거리를 두며 다른 직원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고, 특히 레이첼을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시선을 느낄 때가 많았다.
"비상 전원이 왜 작동하지 않는지 알아요?" 레이첼이 물었다.
에단이 대답하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레이첼의 사무실 방향에서 온 소리였다.
"무슨..." 레이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단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여기 있으면 안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갑자기 긴박해졌다. "저를 따라오세요."
레이첼은 본능적으로 그를 따랐다. 그들은 비상계단으로 향했지만, 계단문을 열기도 전에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발소리였다. 누군가가 그들을 쫓고 있었다.
"빨리요." 에단이 속삭였다.
그들은 계단을 서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 상황이 10년 전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다. 그날 밤, 연쇄살인마 카터 윌리엄 블랙이 그녀의 친구들을 하나씩 죽이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찾아왔던 그 밤.
몇 층을 내려갔을 때, 위에서 계단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첼은 공포에 사로잡혀 발을 헛디뎠다. 그녀가 넘어지려는 순간, 에단이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는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괜찮으세요?" 그가 물었다.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리가 떨려 제대로 서 있기 힘들었다. 에단은 그녀의 상태를 보고 결심한 듯 주변을 살폈다.
"이쪽으로요." 그가 25층 계단문을 열며 말했다.
그들은 어두운 복도로 나왔다. 에단은 레이첼을 작은 회의실로 이끌었다. 문을 닫자마자 그는 레이첼에게 테이블 아래 숨으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질문할 틈도 없이 그의 지시를 따랐다.
에단은 문 옆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의 자세는 마치 훈련받은 군인 같았다. 레이첼은 테이블 아래에서 그를 관찰했다. 희미한 비상등 불빛 아래서도 그의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창백했고,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치 사냥꾼이 먹이를 찾는 것처럼. 레이첼은 숨을 죽였다. 발소리가 회의실 문 앞에서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레이첼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침입자가 들을까 두려웠다. 문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에단은 문 뒤에 숨어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의 몸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문이 열리고, 검은 실루엣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에단은 번개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레이첼은 그가 침입자를 덮치는 것을 보았지만, 그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빨랐다.
짧은 격투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레이첼은 공포에 질려 눈을 감았다.
"괜찮습니다. 나오셔도 됩니다." 에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첼은 조심스럽게 테이블 아래에서 나왔다. 바닥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의식을 잃고 누워있었다. 그의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당신... 어떻게...?" 레이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은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침입자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는 작은 메모지를 꺼냈다. 거기에는 레이첼의 이름과 함께 간단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우리의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 C."
레이첼은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다. C. 카터 윌리엄 블랙. 10년 전 그녀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을 죽인 연쇄살인마. 그는 감옥에 있어야 했다. 그가 어떻게...?
"앉으세요." 에단이 그녀를 의자로 이끌었다. "깊게 숨을 쉬세요."
레이첼은 그의 말에 따랐다. 그녀는 패닉 발작이 올 것 같았다. 10년 동안 악몽에서만 보던 공포가 다시 현실이 되었다.
"당신은 누구죠?" 레이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말로 인턴이에요?"
에단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중요한 건 당신의 안전입니다. 카터가 돌아왔어요."
"어떻게 알아요? 카터라는 이름을..." 레이첼은 혼란스러웠다.
에단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레이첼이 해석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레이첼. 10년 전 일도요."
레이첼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과거는 공개된 적이 없었다. 회사를 설립할 때도 그녀는 자신의 배경을 철저히 숨겼다. 어떻게 이 수수께끼 같은 인턴이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는 것일까?
"경찰에 연락해야 해요." 레이첼이 말했다.
"그러시죠. 하지만 그전에..." 에단이 말을 이었다. "카터가 왜 당신을 노리는지 아세요?"
레이첼은 고개를 저었다. "10년 전에도 이유는 몰랐어요. 그는 그냥... 나타났고, 내 친구들을 죽였죠. 나만 살아남았어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기억하세요?" 에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이첼은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항상 그랬듯이 결정적인 순간은 흐릿했다. 그녀는 카터가 칼을 들고 다가오는 것까지만 기억했다. 그 후의 일은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처럼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기억나지 않아요." 그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에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에게 말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서 나가야 해요.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는 의식을 잃은 침입자를 가리켰다. "그는 혼자가 아닐 겁니다."
레이첼은 망설였다. 그녀는 에단을 신뢰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경찰서로 가요." 그녀가 결심한 듯 말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차가 지하주차장에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해요."
그들은 다시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위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에단은 레이첼보다 앞서 계단을 내려가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포식자의 그것처럼 우아하고 치명적이었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레이첼은 에단이 그녀를 검은색 스포츠카로 안내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인턴이 이런 차를 몰고 다닌다고?
"타세요." 에단이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레이첼이 차에 타자마자 에단은 빠르게 운전석에 앉았다. 그는 엔진을 켜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레이첼은 창밖을 내다보며 여전히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은 정말 누구죠?" 레이첼이 다시 물었다.
에단은 도로에 집중한 채 대답했다.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온 사람입니다."
"누구로부터요?"
"카터로부터.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더 큰 위험으로부터."
레이첼은 혼란스러웠다. "더 큰 위험이라니요? 무슨 말이에요?"
에단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백미러를 확인하며 뭔가를 찾는 듯했다.
"젠장..." 그가 갑자기 속도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레이첼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색 SUV가 그들을 쫓고 있었다.
"누구예요?" 그녀가 두려움에 떨며 물었다.
"카터의 부하들일 겁니다." 에단이 핸들을 꽉 쥐며 말했다. "안전벨트 단단히 매세요."
그는 갑자기 차를 급회전시켰다. 레이첼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에단의 운전 실력은 프로 레이서 수준이었다. 그는 빗길에서도 완벽하게 차를 제어했다.
SUV는 계속해서 그들을 쫓았다. 에단은 좁은 골목길로 차를 몰았다. 그곳은 SUV가 따라오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들은 잠시 추격을 따돌린 것 같았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레이첼이 물었다.
"안전한 장소로요." 에단이 대답했다. "경찰서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카터는 어디에나 사람을 심어둘 수 있어요."
레이첼은 반박하려 했지만, 갑자기 그들의 앞에 검은색 SUV가 나타났다. 에단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미끄러지며 멈췄다.
"뒤로!" 레이첼이 소리쳤다.
하지만 뒤에서도 다른 SUV가 나타났다. 그들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레이첼, 내 말 잘 들으세요." 에단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뭘 하든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제 지시에 따르세요."
레이첼은 혼란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가웠다. 비정상적으로 차가웠다.
"준비됐나요?" 그가 물었다.
레이첼이 대답하기도 전에, SUV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내렸다. 그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고, 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에단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순간, 레이첼은 그의 눈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갑자기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뭐...?" 레이첼은 공포에 질려 물러섰다.
"놀라지 마세요." 에단이 말했다. "당신을 보호할 겁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로 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레이첼은 창밖으로 에단이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을 초인적인 속도와 힘으로 제압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영화의 슬로우 모션 장면처럼 비현실적이었다.
한 남자가 에단에게 총을 겨누었다. 총성이 울렸지만, 에단은 마치 총알을 예측한 것처럼 피했다. 그는 순식간에 그 남자 앞에 나타나 그의 목을 잡았다.
레이첼은 공포와 경이로움이 뒤섞인 감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에단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뱀파이어였다.
몇 분 만에 모든 공격자들이 쓰러졌다. 에단은 다시 차로 돌아왔다. 그의 눈은 여전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그가 물었다.
레이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방금 목격한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당신은... 당신은 뭐예요?"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에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이 천천히 원래의 회색으로 돌아왔고, 송곳니도 사라졌다.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더 많은 이들이 올 거예요." 그가 엔진을 다시 켰다. "지금은 저를 믿어주세요.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레이첼은 망설였다. 그녀는 방금 에단이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것을 목격했다. 그를 두려워해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제 안전가옥으로요. 거기서 모든 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에단이 대답했다. "카터가 왜 당신을 노리는지, 제가 왜 여기 있는지, 그리고... 제가 무엇인지."
레이첼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폭풍우는 여전히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고, 그녀의 인생은 방금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이제 연쇄살인마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세계의 존재까지 알게 되었다.
"10년 전에도 당신이 있었나요?"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에단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네." 그가 마침내 대답했다. "당신을 구한 건 저였습니다."
레이첼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기억 속 공백이 갑자기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왜 기억나지 않는 거죠?"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에단이 말했다. "진실을 알면 위험해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왜 지금 나타난 거예요?"
"카터가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가 혼자가 아닙니다." 에단의 목소리에는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더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어요, 레이첼. 당신은 생각보다 더 특별한 존재입니다."
레이첼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하룻밤 사이에 받아들이기 힘든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에단의 안전가옥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 갈지 생각했다.
폭풍우 치는 밤, 연쇄살인마의 귀환, 그리고 뱀파이어의 등장. 이것은 그녀의 새로운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그녀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다.
차가 도시를 벗어나 외곽으로 향하는 동안, 레이첼은 창밖의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이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카터가 그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단순한 살인마 이상의 존재로.
에단의 안전가옥은 도시 외곽의 숲 속에 위치한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별장 같았지만, 레이첼은 입구에 설치된 첨단 보안 시스템을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는 안전할 겁니다." 에단이 그녀를 안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카터의 부하들은 이곳을 찾지 못할 거예요."
집 안은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었다. 현대적인 가구들과 첨단 기술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지만, 어딘가 차갑고 비인간적인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실제로 살지 않은 공간 같았다.
"앉으세요." 에단이 거실의 소파를 가리켰다. "음료수 드릴까요?"
레이첼은 고개를 저었다. "설명해 주세요. 모든 것을."
에단은 그녀 앞에 앉았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눈 속에는 오랜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저는 뱀파이어입니다." 그가 직접적으로 말했다. "300년 이상 살아왔죠."
레이첼은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직접 목격했다. 하지만 그것을 소리 내어 확인하니 현실감이 더해졌다.
"카터는요?" 그녀가 물었다.
"카터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은 아니죠." 에단이 설명했다. "그는 고대 의식에 관한 지식을 가진 위험한 인물입니다. 10년 전, 그는 특별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피를 이용해 의식을 수행하려 했습니다."
"특별한 혈통이라고요?"
"네. 당신의 혈통은... 특별합니다, 레이첼." 에단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조상 중에는 뱀파이어 사냥꾼이 있었어요. 그들의 피는 뱀파이어에게 독이 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이첼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을 그룹홈에서 보낸 그녀에게 가족 역사는 항상 미스터리였다.
"그래서 카터가 내 친구들을 죽인 거예요? 나를 찾기 위해서?"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신의 피를 이용해 강력한 의식을 수행하려 했습니다. 그 의식은 그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에단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마치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저는 오랫동안 당신의 혈통을 추적해 왔습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뱀파이어 사냥꾼의 후손들은 드물고 귀중합니다. 그들은 보호받아야 해요. 카터가 당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저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
"그날 밤, 카터가 당신을 공격하려 할 때 제가 개입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었어요."
"무슨 뜻이에요?" 레이첼은 혼란스러웠다.
"당신의 피에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레이첼. 극도의 위험 상황에서 그 힘이 발현되었어요. 당신은 카터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것이 그를 물리친 겁니다."
레이첼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왜 기억이 없는 거죠?"
"그것은 제 잘못입니다." 에단이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기억을 지웠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되면,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어요."
레이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이 내 기억을 조작했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뱀파이어는 인간의 기억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에단이 설명했다. "당신을 위한 결정이었어요."
"내 인생에 대한 결정을 당신이 어떻게 내릴 수 있죠?" 레이첼이 소리쳤다. "10년 동안 악몽에 시달리며 살았어요! 내가 왜 살아남았는지, 내 친구들은 왜 죽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에단은 그녀의 분노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요.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레이첼은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거짓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왜 나타난 거죠?" 그녀가 다시 물었다. "카터가 감옥에서 탈출했나요?"
"그는 2년 전에 탈출했습니다." 에단이 말했다. "그동안 숨어 있었어요. 새로운 계획을 세우면서."
"그런데 왜 지금?"
"그가 더 강력해졌기 때문입니다." 에단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그의 뒤에는 더 큰 세력이 있어요."
"어떤 세력이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당신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온 겁니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레이첼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에요. 뱀파이어, 초자연적인 세력, 고대 의식... 마치 영화 같아요."
"현실은 때로 픽션보다 더 이상합니다." 에단이 약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레이첼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그녀가 물었다.
"우선, 당신은 여기 머물러야 합니다. 안전을 위해서요." 에단이 말했다. "제가 카터의 움직임을 추적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깨우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내 능력이요?"
"네. 당신의 혈통에서 오는 힘이요. 그것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면, 카터로부터 자신을 더 잘 보호할 수 있을 거예요."
레이첼은 망설였다. 그녀는 여전히 에단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구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회사는요? 내일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어요."
"소피아에게 연락해서 당신이 개인 사정으로 며칠 자리를 비울 거라고 알리세요." 에단이 제안했다. "지금은 당신의 안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성공적인 CEO에서 초자연적인 세계에 휘말린 사냥감으로.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그녀가 말했다. "왜 저를 도와주는 거죠? 당신은 뱀파이어잖아요. 내 피가 당신에게 독이 된다면서요."
에단은 그녀를 깊이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 눈에는 레이첼이 읽을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모든 뱀파이어가 같지는 않습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인간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려 노력해 왔어요. 그리고... 당신의 혈통은 특별합니다. 보호받아야 해요."
그의 대답은 진실처럼 들렸지만, 레이첼은 그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눈 속에는 더 깊은 이유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좀 쉬세요." 에단이 일어서며 말했다. "내일은 긴 하루가 될 겁니다."
그는 레이첼에게 침실을 안내했다. 방은 미니멀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편안해 보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에단이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저는 밤새 경계를 서고 있을 겁니다."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날 구해줘서."
에단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진심 어린 미소였지만, 동시에 슬픔이 담겨 있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레이첼." 그가 말하고 문을 닫았다.
혼자 남겨진 레이첼은 침대에 앉았다. 그녀는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을 되새겼다. 에단이 뱀파이어라는 것, 카터가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그녀 자신이 특별한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
창밖으로 폭풍우가 조금 잦아든 것 같았다. 레이첼은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집 주변을 순찰하는 에단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그는 비에 젖은 채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레이첼은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그녀는 잠들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극도의 피로감이 그녀를 덮쳤다. 눈을 감자마자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 속에서, 그녀는 10년 전 그날 밤을 다시 보았다. 카터가 칼을 들고 다가오는 모습,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의 손에서 붉은 빛이 퍼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이 카터를 밀어내는 순간,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에단의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