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2**
20세가 된 한지율은 어스 협회 본부 앞에 서서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테라 쉘터의 상층부에 위치한 이 거대한 건물은 크리쳐 아포칼립스 이후 인류의 마지막 보루 중 하나인 테라 쉘터의 심장부였다.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건물 외벽은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지만, 그 화려함 속에도 어딘가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지율의 검은 머리카락이 이른 아침의 선선한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깊은 눈매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사람 특유의 경계심을 담고 있었다. 목의 왼쪽에는 신비로운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9년 전, 크리쳐의 습격으로 부모를 잃은 그 날 밤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오늘부터 달라질 거야.'
지율은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스 협회장의 추천으로 이능력자 연합 특수부대에 합류하게 된 첫날이었다. 보육시설에서 자란 9년 동안, 그는 자신의 이능력을 제어하지 못해 동료들에게 소외되었고,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의 능력이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는 곳, 자신과 같은 이능력자들이 모인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다.
본부 로비는 분주했다. 다양한 유형의 이능력자들과 지원 인력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율은 안내 데스크에서 자신의 신분을 확인받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42층, 특수부대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를 맞이한 것은 차분한 분위기의 사무실 공간이었다. 투명한 유리벽으로 구분된 여러 회의실과 훈련장, 그리고 중앙의 작전 상황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지율 씨, 맞죠?"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서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짙은 청색 머리카락과 깊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세한 주름이 있었지만, 그것은 나이보다는 많은 경험을 암시하는 듯했다.
"네, 맞습니다." 지율이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슬입니다. 특수부대 2팀 팀장이에요. 오늘부터 당신을 담당하게 됐어요."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었지만, 그 눈빛은 지율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특히 그의 목에 있는 문양에 시선이 잠시 머무는 것을 지율은 놓치지 않았다.
"따라오세요. 팀원들에게 소개해 드릴게요."
윤슬은 지율을 안내하며 사무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물이 흐르듯 부드럽고 우아했다. 지율은 그녀가 물을 다루는 이능력자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스의 베테랑 요원으로, 많은 신입 이능력자들의 멘토 역할을 했다고 했다.
작은 회의실에 들어서자 세 명의 인물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윤슬이 차례로 소개했다.
"이쪽은 최진우 요원, 우리 팀의 정보 분석 담당입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경 너머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쪽은 박세라 요원, 의료 지원 담당이에요."
짧은 머리의 여성이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우리 팀의 막내, 나인입니다."
윤슬이 마지막으로 소개한 인물은 지율보다도 어려 보였다. 17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은 밝은 갈색 머리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는 미세한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나인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저도 최근에 들어왔어요. 반갑습니다."
지율은 그들에게 간단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9년간의 고립된 생활은 그를 사람들과의 교류에 서툴게 만들었다.
"자, 이제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윤슬이 테이블 중앙의 장치를 작동시키자 홀로그램 화면이 나타났다. 테라 쉘터의 지도와 함께 여러 지점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오늘부터 우리 팀은 [도시 청소] 작전을 수행합니다. 최근 6개월간 쉘터 내 하층부에서 연속적인 실종 사건과 살인 사건이 발생했어요. 일반 경찰력으로는 해결이 어려워 어스에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홀로그램이 바뀌며 여러 피해자들의 사진이 나타났다. 대부분 20-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피해자들 사이에 특별한 연관성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모든 사건 현장에서 이상한 에너지 흔적이 감지됐어요. 이능력자가 개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율은 화면을 주시하며 정보를 빠르게 흡수했다. 그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질문 있으신가요, 한 요원?" 윤슬이 지율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지율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이 에너지 흔적... 크리쳐의 것과 유사한 점이 있나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윤슬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날카로운 질문이네요. 네, 일부 흔적은 크리쳐의 것과 유사한 패턴을 보입니다. 하지만 쉘터 내부에 크리쳐가 침입했다는 증거는 없어요. 그래서 더 수수께끼죠."
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여러 가설이 형성되고 있었다.
"브리핑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오후부터 현장 조사를 시작할 예정이니 준비해 주세요. 한 요원은 나인과 함께 움직이게 될 겁니다. 나인, 신입 요원에게 장비실과 시설을 안내해 주세요."
윤슬의 지시에 나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팀장님. 따라오세요, 한 선배."
지율은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라고 부르지 마. 그냥 지율이라고 불러."
나인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환하게 웃었다. "알겠어요, 지율... 씨?"
"그냥 지율."
"알겠어요, 지율!"
두 사람이 회의실을 나서자 윤슬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지율의 목에 있는 문양을 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분명 그 표식이었다. 해월 쉘터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 속 '균형의 열쇠'와 동일한 문양이었다.
'왜 하필 지금...?' 윤슬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왜 하필 그 아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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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실은 특수부대 사무실 한쪽에 위치해 있었다. 벽면을 따라 다양한 무기와 보호장비들이 정돈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특수 제작된 전투복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기서 자신에게 맞는 장비를 선택하면 돼요." 나인이 설명했다. "모든 장비는 이능력자의 특성에 맞게 조정할 수 있어요. 지율은 바람 이능력자죠?"
지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벽에 진열된 장비들을 살펴보다가 가벼운 소재의 전투복과 작은 단검 두 개를 선택했다.
"그거 좋은 선택이에요!" 나인이 밝게 말했다. "가볍고 공기 저항이 적어서 바람 이능력자에게 딱이죠."
지율은 대답 없이 전투복을 들어 크기를 확인했다. 그의 무표정한 반응에도 나인은 계속해서 친근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저는 전기 이능력자예요. 17살에 특수부대에 발탁됐다고 하면 놀라시겠죠? 사실 저도 아직 제 능력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해요."
나인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전기 스파크가 튀었다. 그는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실수로 전자기기를 망가뜨릴 때가 많아요. 지난주에는 작전실 컴퓨터 세 대를 한꺼번에 다운시켰다니까요."
지율은 잠시 나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미세한 공감의 빛이 스쳤다. 그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이능력을 제어하지 못해 많은 문제를 일으켰었다.
"통제하는 법을 배우게 될 거야." 지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나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요? 지율도 처음에는 어려웠나요?"
지율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분노나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버렸던 순간들. 보육시설에서 다른 아이들이 그를 '폭풍 괴물'이라고 부르며 피했던 기억들.
"...어려웠어."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두 사람은 장비실을 나와 훈련장으로 향했다. 넓은 공간에는 여러 이능력자들이 각자의 능력을 연마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불을 다루는 이능력자가 표적을 향해 정확한 화염 화살을 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중력을 조작하는 이능력자가 물체를 부유시키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능력 테스트를 해봐야 해요." 나인이 설명했다. "신입 요원들은 자신의 능력 수준과 통제력을 평가받거든요."
지율의 표정이 굳어졌다. "테스트?"
"네, 걱정 마세요. 기본적인 것만 확인하는 거예요. 얼마나 강력한지,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이요."
지율은 불편한 표정으로 훈련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다양한 센서가 설치된 특수 구역이 있었다.
"준비되면 시작하세요." 통제실에서 기술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율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앞으로 뻗었다. 순간, 강력한 바람이 훈련장 반대편의 표적을 향해 날아갔다. 표적은 바람의 압력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와, 대단해요!" 나인이 감탄했다.
하지만 지율의 표정은 점점 긴장되어 갔다. 그의 눈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고, 주변의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그것은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바람은 통제를 벗어나 훈련장 전체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런, 멈춰요!" 나인이 소리쳤지만, 지율은 이미 자신의 능력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 순간,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깊게 쉬세요, 한 요원."
윤슬이 훈련장에 들어서며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지율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서는 푸른빛의 물 에너지가 흘러나왔다.
"바람은 자유롭지만, 당신이 그 흐름을 인도할 수 있어요.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함께 흐르세요."
윤슬의 물 에너지가 지율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을 감싸안는 듯한 형태였다. 지율은 윤슬의 말에 따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그의 주변의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좋아요, 그대로예요."
바람이 완전히 멈추자, 지율은 땀에 젖은 얼굴로 윤슬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당혹감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필요 없어요." 그는 차갑게 말했다. "내 능력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윤슬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하지만 팀으로 일하는 법도 배워야 해요. 여기서는 혼자가 아니니까요."
지율은 대답 없이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나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따라갔다.
윤슬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손목에 착용한 통신 장치를 작동시켰다.
"협회장님, 저예요. 그 아이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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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은 어스 협회 본부 옥상에 서 있었다. 저 멀리 테라 쉘터의 경계선이 보였고, 그 너머로는 크리쳐들이 지배하는 황폐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2071년의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 먼지로 가득했다. 크리쳐 아포칼립스 이후 지구의 모습이었다.
'왜 여기에 왔지?' 그는 자문했다.
어스 협회장의 추천으로 특수부대에 합류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속한 곳이 없다고 느꼈다. 9년 전, 그 끔찍한 밤 이후로 그는 항상 혼자였다. 부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갑자기 발현된 이능력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그날 이후로.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목의 문양을 만졌다. 그것은 따뜻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여기 있었군요."
지율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스 협회장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60대 초반의 남성, 백발이 섞인 머리카락과 깊은 주름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고 강인했다.
"협회장님." 지율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첫날부터 훈련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네." 협회장의 목소리에는 비난보다는 이해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지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먼 지평선을 바라볼 뿐이었다.
"네 능력은 특별해, 지율." 협회장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도 따르지. 왜 내가 너를 특수부대에 추천했는지 알고 있나?"
지율은 천천히 협회장을 향해 돌아섰다. "제 이능력 때문이겠죠."
협회장은 미소 지었다. "부분적으로는 맞아. 하지만 그것보다는... 네가 특별한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특별하다고요?" 지율의 목소리에는 비꼼이 묻어 있었다. "폭풍 괴물이라고 불리는 게 특별한 건가요?"
협회장은 천천히 지율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 부모님은 단순한 순찰대원이 아니었어, 지율."
지율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은 네 능력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는 데 집중해야 해. 윤슬은 최고의 멘토가 될 거야. 그녀를 믿어."
협회장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몸을 돌려 옥상을 떠났다. 지율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단순한 순찰대원이 아니었다고? 그럼 뭐였다는 거지?'
그의 머릿속에는 더 많은 의문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의문들 사이로, 오래전부터 그를 괴롭혀온 반복적인 악몽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불타는 하늘 아래 서 있는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그에게 손을 뻗는 신비로운 빛의 존재.
지율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곳에 온 것이 새로운 시작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과거와 정체성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내가 누구인지, 이 문양이 무엇인지, 그리고 부모님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내고 말 거야.'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저 멀리 쉘터의 경계선 너머로 태양이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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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테라 쉘터 하층부.
쉘터의 계층은 뚜렷했다. 상층부에는 정부 기관과 부유층이, 중층부에는 일반 시민들이, 그리고 하층부에는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하층부는 좁고 어두운 골목길과 낡은 건물들로 가득했다. 쉘터 건설 초기의 임시 구조물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곳이었다.
지율과 나인은 첫 번째 실종 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조사하고 있었다. 좁은 아파트 건물 안,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은 방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나인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미세한 전기로 주변을 밝히며 말했다.
지율은 대답 없이 방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의 눈은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자국에 고정되었다.
"여기."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에너지 흔적이 있어."
나인이 다가와 그가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았다. 바닥에는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이상한 얼룩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무언가가 타오른 후 남은 재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미세하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건... 크리쳐의 흔적 같아요." 나인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아. 뭔가... 인위적인 느낌이 있어."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 흔적 위로 가져갔다. 순간, 그의 목에 있는 문양이 미세하게 빛났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강렬한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불타는 눈을 가진 여성의 얼굴.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
'가이아의 씨앗...'
"윽!" 지율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괜찮아요?" 나인이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지율은 진정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냥...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어."
그는 자신이 본 환영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생생했고, 마치 누군가가 직접 그의 마음속에 메시지를 심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이아의 씨앗... 그게 뭐지?'
두 사람은 계속해서 방을 조사했다. 나인이 피해자의 개인 물품들을 살펴보는 동안, 지율은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창밖으로는 좁은 골목이 보였고, 그 너머로 다른 낡은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때, 창문 유리에 비친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건물 옥상에 서 있는 인영이었다. 검은 망토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었지만, 지율은 그 존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율이 재빨리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 그 인영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뭐 보셨어요?" 나인이 물었다.
지율은 잠시 망설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조사하자."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자리 잡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것이 이 모든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두 사람이 아파트를 나와 다음 조사 지점으로 향하는 동안, 지율은 계속해서 주변을 경계했다. 하층부의 좁은 골목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희미한 조명 아래 그림자들이 춤추는 듯했다.
"여기 사람들은 정말 힘들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나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크리쳐 아포칼립스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고 하지만, 결국 인간 사회의 불평등은 그대로인 것 같아요."
지율은 그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 역시 보육시설에서 자라며 하층부의 삶을 경험했었다. 상층부의 화려함과 하층부의 척박함 사이의 격차는 너무나 컸다.
"이능력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 지율이 드물게 자신의 생각을 나눴다. "오히려 더 힘들 때도 있지. 통제하지 못하는 힘을 가진다는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도 있으니까."
나인은 잠시 지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해와 공감이 담겨 있었다.
"저도 그래요. 가끔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는 손가락 끝에서 작은 전기 불꽃을 만들어내며 미소 지었다. "이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지율은 나인의 순수한 열정에 잠시 감탄했다. 17살의 나이에 이미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그는 자신이 그 나이였을 때를 떠올렸다.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끝없는 혼란 속에 갇혀 있었던 시간들.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네." 그는 마침내 대답했다.
두 사람은 두 번째 실종 사건 장소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하층부의 작은 시장 근처였다. 피해자는 시장에서 일하던 20대 여성이었다. 그녀는 퇴근길에 사라졌고, 이틀 후 시장 뒤편 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여기서도 같은 에너지 흔적이 발견됐어요." 나인이 자료를 확인하며 말했다.
지율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는 무언가를 느꼈다. 미세한 공기의 진동, 그리고 그 속에 섞인 이상한 에너지.
"조심해." 그가 나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피부는 검은 비늘로 덮여 있었고,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크리쳐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크리쳐와는 달랐다. 이것은 마치 인간과 크리쳐의 중간 형태 같았다.
"뭐야 이건!" 나인이 놀라서 외쳤다.
크리쳐는 놀라운 속도로 지율을 향해 돌진했다. 지율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바람의 벽을 만들었다. 크리쳐는 그 벽에 부딪혀 뒤로 날아갔지만, 곧 다시 일어나 공격 태세를 취했다.
"통신기로 지원 요청해!" 지율이 나인에게 소리쳤다.
나인은 재빨리 통신기를 작동시켰다. "긴급 상황! 하층부 시장 구역에서 크리쳐 발견! 지원 요청!"
크리쳐는 다시 공격해왔다. 이번에는 더 교묘하게 움직였다. 마치 전투 훈련을 받은 것처럼 지율의 방어를 피해 접근했다.
지율은 더 강력한 바람을 일으켰다. 좁은 골목 전체가 회오리바람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바람은 점점 더 강해져 그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지율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제어하려 했지만, 감정이 고조될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주변의 쓰레기통과 간판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나인은 전기 충격을 크리쳐에게 발사했지만, 크리쳐의 비늘이 그 충격을 대부분 흡수했다. 크리쳐는 나인을 향해 돌진했고, 지율은 그것을 막기 위해 바람의 칼날을 날렸다.
바람의 칼날은 크리쳐의 어깨를 베었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크리쳐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는 인간의 것과 너무나 유사했다.
지율은 순간 망설였다. 그 틈을 타 크리쳐는 벽을 타고 옥상으로 도주했다.
"쫓아가야 해!" 지율이 외쳤다.
두 사람은 크리쳐를 쫓아 건물 외벽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옥상에 도착했을 때, 크리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검은 망토를 입은 인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야?" 지율이 경계하며 물었다.
인영은 천천히 돌아섰다. 검은 마스크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졌다.
"한지율." 그림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목의 문양... 그것은 고대 이능력자 전설과 연관되어 있다."
지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누군지,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나는 '그림자'라고 불러. 센터의 리더지." 인영이 대답했다. "어스가 너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군. 네 부모님에 대해서도, 네 목의 문양에 대해서도."
"내 부모님이 어떻다는 거야?" 지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림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 지율을 가리켰다. "그들은 단순한 순찰대원이 아니었어. 비밀 프로젝트에 관여했지. '가이아의 씨앗'이라는 프로젝트에."
지율의 주변 공기가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감정이 고조되면서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거짓말이야!" 그가 소리쳤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우리와 함께 해." 그림자가 제안했다. "어스는 너를 이용하고 있어. 그들은 네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어."
그 순간, 원거리에서 날아온 물 화살이 그림자와 지율 사이를 갈랐다. 윤슬이 도착한 것이다.
"물러서, 그림자." 윤슬이 차갑게 말했다. "그는 어스의 요원이야."
그림자는 잠시 윤슬을 바라보다가 다시 지율에게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 봐, 한지율. 네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문양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센터를 찾아와."
말을 마친 그림자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그림자 조작 이능력을 사용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윤슬이 지율과 나인에게 다가왔다. "괜찮니?"
지율은 대답 대신 윤슬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당신도 알고 있었죠? 내 부모님에 대해, 이 문양에 대해."
윤슬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지율, 모든 것을 한 번에 설명할 수는 없어. 때가 되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죠?" 지율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협회장님도 같은 말을 했어요.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고. 하지만 그 '때'는 언제죠?"
윤슬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돌아가자. 오늘 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해."
지율은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의심의 씨앗이 깊이 심어졌다. 어스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부모와 목의 문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가이아의 씨앗... 내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말 거야.'
세 사람은 침묵 속에 하층부를 빠져나와 어스 본부로 돌아갔다. 하늘에는 어둠이 깊게 내려앉고 있었고, 테라 쉘터의 인공 조명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지율의 운명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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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 협회 본부, 회의실.
윤슬은 오늘의 사건에 대해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었다. 홀로그램 화면에는 크리쳐의 모습과 발견된 에너지 흔적의 분석 결과가 표시되어 있었다.
"오늘 발견한 크리쳐는 일반적인 형태가 아닙니다. 인간의 특성과 크리쳐의 특성이 혼합된 형태로, 이것은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생체실험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의실에는 지율과 나인 외에도 다른 팀원들과 회장 대리가 참석해 있었다. 회장 대리는 40대 후반의 여성으로, 협회장의 사망 시 어스를 이끌게 될 인물이었다. 그녀는 윤슬의 보고를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센터의 개입도 확인되었습니다." 윤슬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들의 리더 '그림자'가 한 요원에게 접근했습니다."
모든 시선이 지율에게 향했다. 그는 불편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지?" 회장 대리가 물었다.
지율은 잠시 망설였다. 그림자의 모든 말을 공개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내 부모님이 '가이아의 씨앗'이라는 비밀 프로젝트에 관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 목의 문양이 고대 이능력자 전설과 연관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회의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윤슬과 회장 대리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센터는 어스를 이간질하려는 의도로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회장 대리가 말했다. "그들의 말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한 요원."
지율은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척했지만, 내심 그는 센터의 말이 완전한 거짓이 아니라고 느꼈다. 특히 '가이아의 씨앗'이라는 단어는 그가 이전에 환영 속에서 들었던 것과 일치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를 떠난 후, 지율은 윤슬을 불러 세웠다.
"팀장님, 잠시 시간 있으세요?"
윤슬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두 사람은 빈 회의실에 남았다. 지율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저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누구인지, 이 문양이 무엇인지...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슬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지율, 나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해. 하지만... 네 목의 문양은 특별해. 그것은 '균형의 열쇠'라고 불리는 표식이야."
"균형의 열쇠요?"
"그래. 해월 쉘터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세상의 균형이 깨질 때 나타나는 표식이라고 해. 그리고 그 표식을 가진 자는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전해져."
지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제가..."
"확실한 건 아니야. 하지만 네 부모님은... 그들은 특별한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었어. 크리쳐 아포칼립스 이전부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지."
"무엇을요?"
윤슬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해. 협회장님만이 전체 그림을 알고 계셨어.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네 능력을 제어하는 것이 중요해. 네가 특수부대에 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네 잠재력을 깨우고, 네 능력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지율은 윤슬의 말을 곱씹었다. 그것은 완전한 답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조각 퍼즐의 일부를 맞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그는 마침내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모든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윤슬은 미소 지었다. "그럴 거야, 지율. 때가 되면."
두 사람이 회의실을 나서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경보음이 울렸다. 비상 상황이었다.
"모든 요원들은 즉시 작전실로 집합하라! 반복한다, 모든 요원들은 즉시 작전실로 집합하라!"
윤슬과 지율은 서로를 바라본 후 재빨리 작전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요원들이 모여 있었고, 대형 스크린에는 테라 쉘터 외곽의 지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죠?" 윤슬이 회장 대리에게 물었다.
"외곽 연구소에서 이상 징후가 감지됐어요." 회장 대리가 답했다. "대규모 에너지 파동이 감지되었고, 연구소와의 통신이 두절됐습니다."
스크린에는 연구소 주변으로 붉은색 경고 표시가 깜빡이고 있었다.
"정찰팀을 보냈지만, 아직 보고가 없어요." 회장 대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정예부대를 투입할 예정입니다."
윤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팀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오, 윤슬 팀장." 회장 대리가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의 팀은 신입 요원이 있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팀이 맡을 거예요."
지율은 그 말에 불만을 느꼈다. "저 때문에 팀이 제외된다면, 저만 빼고 가시면 됩니다."
"그건 안 돼." 윤슬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팀으로 움직여. 한 명이라도 빠지면 안 돼."
회장 대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윤슬 팀도 참여하되, 후방 지원으로 배치하겠습니다. 한 요원, 이것은 당신의 첫 대규모 작전이 될 거예요. 팀장의 지시를 철저히 따르세요."
지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번 작전이 자신의 과거와 정체성에 관한 단서를 찾을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작전실을 나오는 길에, 그는 문득 자신의 목 문양이 따뜻하게 맥동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무언가가 그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균형의 열쇠... 가이아의 씨앗...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일까?'
지율은 결연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앞에는 더 큰 시련과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을 것이었다.